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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새벽, 양동시장을 가다. 양동 1748 2007-01-31
내 용

▲ 새벽 5시, 냉기를 피하기 위해 상인들이 장작불 근처로 모여들었다.




국내 굴지의 유통기업들이 광주에 들어설 때면 어김없이 재래시장이 그 피해자로 등장한다.
또 광주시의 시내버스 노선개편에 따른 피해도 재래시장에 집중된다고 시장 상인들은 아우성이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재래시장을 위해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어 `현대’시장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지만 외관만 그럴싸하다는 이야기도 계속된다.


광주재래시장의 맏이격인 양동시장도 빠질 수 없다.
새벽 양동시장을 찾아 남보다 3~4시간, 아니 그 이상 빨리 하루를 시작하는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극일(59)씨는 23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 양동시장 입구 조금 위에 자리를 잡았다.
13년간 하루도 빠짐 없이 제 시간, 제 장소를 정하니 단골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까지, 그가 말하는 `꽃등심’ 배추는 여전히 1t 트럭 안에 남아있다.
예전 같으면 벌써 다 팔고 집에 가서 뜨뜻한 아랫목에 추위를 녹일 시간이다.

“장사, 안 된당께. 나야 단골이라도 있능께 이 정돈디. 다른 트럭들 봐봐. 아직도 쟁겨놓고 못 파는 사람들 투성이랑께.”

건축일을 하다 사람 넘쳐나는 양동시장을 보고 `돈 되겄다’싶어 부인과 시작했지만 지금 만큼 어려운 적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영암에서 배추를 떼 소매를 하는 시장 상인들에게 파는 그의 `마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양동시장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여는 가게는? 답은 야채상이다.
이들이 문을 여는 평균 시간대는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
대부분 점포들이 이 때부터 야채를 다듬기 시작해 새벽 6시 정도부터 소매를 시작한다.


하지만 야채상보다 먼저 문을 여는 곳이 있다.
시장 바깥 도로에 `장’을 여는, 한마디로 `트럭 상인’이다.
이들은 보통 자정에서 새벽 3시까지 전날 영광·해남·장성 등 전남 각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싣고 소매상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배추를 예로 들어보자.
배추 8포기가 들어있는 한 묶음은 3000원에 소매상에게 넘겨지며 소매상은 이를 3500~4000원에 소비자들에게 판다.
대략 500~1000원의 이윤을 남기는 셈이다.

그 다음에 문을 여는 점포는 어물전이다.
어물전은 대략 새벽 3시가 조금 넘어 손님을 맞는다.

시장 손님들이 줄어들면서 예전 같으면 하루 온 종일 장사를 했던 국밥집들도 자취를 감췄다.
한 국밥집 주인은 “지금은 밤 11시에 문을 닫고 오전 7시에 다시 나온다”며 “손님이 없으니 상인들이 나오는 시간도 늦춰지고, 그러다보니 팔리는 국밥이 5그릇 미만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새벽 시장을 찾는 손님들도 예전과는 달랐다.
보통 대규모 식당이나 급식소 등이 주고객이었다면 최근에는 새벽예배나 미사를 보고 귀가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당연히 한 명의 고객이 사가는 양이 현저히 줄었다.

예배를 마친 김정석(37)씨는 집에 가는 도중 어머니가 배추쌈을 좋아한다며 배추 8포기를 샀다.
야채를 파는 ㅇ(56)씨는 “중국산 김치가 식당가를 점령하면서 새벽시장에 식당 주인들이 거의 사라졌다”며 “지금은 물건을 사도 만원대를 넘는 손님을 구경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시장상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작불을 쬐는 자리에서의 주제도 역시 `안 되는 장사’였다.

서구 유덕동에서 자신이 직접 농사 지은 방울토마토며 애호박 등을 가져다 파는 ㅎ(70)씨는 장사가 안 되니 시장에 나오는 시간을 새벽 1시에서 3시간 뒤로 옮겼다.
예전 같으면 시장 주위를 뺑 둘러 자리 차지에 여념이 없어야 하는 상인들의 수가 그 만큼 줄었다는 말이다.

ㅎ씨는 “한 시간이믄 다 팔았는디. 지금은 동이 터와도 사가는 사람이 없당께.
이거 가져갔다가 내일 또 나오믄 뭐혀. 또 안 팔린디.”




▲ “오는 손님마다 죽겄다고 한께…”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깨죽과 콩물을 1000원에 파는 ㄱ(65)씨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벌써 10년 넘게 가격 변동 없이 팔고 있다.
집에서 준비한 따뜻한 깨죽과 콩물을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 설탕을 뿌리고는 손님 손에 건넸다.

“남는 것은 거의 없제. 지금까지 먹고 살았응께, 그것이믄 됐고.
근디 오는 손님마다 죽겄다고 한께 장사가 안 되기는 안 된갑서.”


비교적 젊은 장사꾼도 간혹 눈에 띄었다.

직장을 다니다 생두부를 만들어 파는 ㅊ(40)씨에게 하루 얼마나 파냐고 물어보니 대답은 `절대 불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만 다른 가게보다는 잘 되는 편이라고 말을 돌린 그의 주 고객은 새벽예배나 미사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년부인 또는 노부부.

어묵 3봉지와 두부 한 모를 사가는 노부부가 만원짜리 지폐를 건넨 뒤 생각보다 많은 거스름돈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부부의 손에 건네진 돈은 2400원이었다.

어머니의 젓갈가게를 물려받아 13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성민(34)씨의 요즘 불만은 `시내버스 노선개편’에 있다.
시장 안 쪽으로 들어갈수록 장씨와 같은 생각을 가진 상인들이 늘어났다.

새벽 4시에 나오다가 요즘은 6시를 넘겨야 문을 연다는 정씨는 “재래시장 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버스를 이렇게 한다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요즘 먹기 딱 좋은 젓갈로 꼴뚜기·오징어젓을, 입맛이 없을 때는 고추장아찌를 추천해줬지만 얼굴은 어두웠다.

야채상들이 즐비한 골목에 들어서자 소매상인들이 손님들에게 팔 야채를 다듬고 있었다.
요즘 주로 팔리는 것은 대파. 보통 20~25개를 한데 묶어 1500원에 판다.
찬 바람을 막기위해 비닐 천막을 친 창고 안에 아낙네 3명이 대파를 손질하고 있었다.

새벽 3시에 영광에서 대파를 건네 받은 이들은 6시까지 대파를 팔기 적당하게 묶고 본격적인 장사를 시작했다.
야채상 골목을 돌아 어물전으로 자리를 옮기니 대낮처럼 불이 환하다.

맨 앞에 자리한 대성상회 김형수(63)씨는 첫 손님이 언제 오느냐를 기다리며 무안낙지며 어패류 등을 보기좋게 진열하고 있었다.
직장에 다니다 10년 전 그만두고 시장에 자리를 잡았다는 그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서로 얼굴만 마주보고 하루가 다 갈 때가 있다니까.
한 번 둘러봐. 손님이 있나. 전부 장사하는 사람들이랑께.”라고 푸념했다.

대체나 안 쪽으로 들어갈수록 손님 같은 형색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부 3~4명이 그 긴 통로를 휘휘 걸어다니는 정도.
김씨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만해도 오전까지 한 10명은 왔는디. 인자 4명으로 줄어부렀어”라고 덧붙였다.
김씨가 추천한 최근 잘 나가는 품목은 매생이로, 400g에 4500원에 팔고 있다.



▲ 야채상들이 준비한 시장안 골목을 아주머니가 휘휘 걷고 있다. 새벽에 장을 보는 식당주인 등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시장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시장 입구 쪽으로 나서니 한 두 시간 전에 없었던 냉동오리를 파는 트럭이 나타났다.
스피커에서는 “오리 훈육·뼈 각종 오리고기 다 팔아요”라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시끌벅적한 상인과 손님들의 부대낌이 사라진 새벽 양동시장의 유일한 `소리’인 셈이다.

직업군인, 덤프트럭기사를 거쳐 수년 전부터 오리고기 장사를 하는 ㅇ(48)씨는 “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자리가 없어 돌아가곤 했는데 6시30분이 넘었는데도 자리가 있네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리 뼈 2000원 어치를 팔고 나서 다시 장작불 근처로 다가온 그는 “우리 같은 서민들이 잘 먹고 살아야한디.
갈수록 팍팍해진께”라며 혀를 찼다.


아직 겨울아침은 멀었다.

오전 7시, 하지만 시내버스가 다니고 거리 가로등이 하나씩 꺼져가는 데도 기다리는 손님은 상인들의 `양’에 안 차고 있었다.
손님들을 기다리며 새벽 길을 달려 야채나 생선을 다듬고 예쁘게 내놔보지만
정작 그것을 사는 손님들은 이제 재래시장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돌아오게 하려면?

상인들도, 정부도, 지방자치단체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외관만 깨끗하게 바뀐다고 해서 손님들이 가던 발길을 되돌리는 법은 없을 것이라는 게 상인들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