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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과향교 (玉果鄕校)
명 칭 옥과향교 (玉果鄕校)
소재지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14-1
관리자 옥과향교
문화재 종목 시도유형문화재 109호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옥과향교가 처음 지어진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원래의 자리가 황산이었는데 율정으로 옮겼고, 조선 영조 31년(1755)에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정조 20년(1796)에 수리하였으며, 고종 광무 2년(1898)에 다시 고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앞쪽 낮은 곳에는 배움의 공간으로 명륜당을 두고, 뒤쪽 높은 곳에는 제사공간으로 대성전을 두고 있다.
이곳은 향교의 일반적 배치형태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걸쳐 제사만 지낸다.
이곳에 보관하고 있는 책 중 『양목재절목』, 『향교전곡출입절목』 등은 옥과향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료로 간주된다.



이 향교의 창건연대(創建年代)는 알 수 없으나 원래는 황산(凰山)에 있었다가 율정(栗亭)으로 옮겼고,
조선(朝鮮) 영조(英祖) 31년(1755) 설산(雪山) 아래인 현 위치로 옮겼으며
정조(正祖) 20년(1796) 중수(重修)하였다고 한다.

그후 고종(高宗) 광무(光武) 2년(1898) 재차(再次)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사지에 위치하여 학당부(學堂部)인 명륜당(明倫堂)을 전면에 두고 문묘부(文廟部)인 대성전(大成殿)을 후면 높은 곳에 두어
일반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配置形式)을 따르고 있다.
문묘 내에는 5성(五聖)과 중국4현(中國四賢)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춘추(春秋)로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있다.



옥과향교 - 명륜당




옥과향교 - 대성전









2. 설 산
명 칭 설 산
소재지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14-1
해발 522m
기타 곡성팔경의 하나, 옥과 목동과 담양 무정면. 순창 풍산면의 경계

설산은 신비로운 산이다.

멀리서 보면 볼수록 사자가 하늘을 우러러 포효한 듯한 기암괴석이 적막에 쌓여져 그 모습이 더욱 신비롭다.
하루종일 기세좋게 작열하던 태양도 시간은 어쩔수 없는 듯 설산 봉우리에 걸려 오색찬란한 황혼을 펼치노라면
그 광대함에 선뜻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그러다 연못에 잠기듯 석양이 두 바위산 사이에 계곡으로 빠져드는 광경의 아름다움은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하는데
예부터 이러한 낙조의 비경을 두고 우리 선대들이 곡성팔경의 하나로 칭송해 왔다.
그 옛날 모진 시집살이 온종일 김 밭 메던 우리네 어머니들이 허리를 길게 펴고 일감을 마감하며 바라보던 그 눈에도
설산낙조는 퍽이나 신비롭고 반가웠으리라.

설산은 담양 금성산으로부터 맥을 이어와 우뚝 서 용트름을 하다
구불구불 탯줄을 이어 삼기 대명산을 이루고 불노치를 지나 통명산을 솟게 하고는 서북으로 갈라져 나와
묘치를 넘어 동악산을 이어가는 과거 옥과현의 진산이다.
즉, 옥과를 비롯한 오산면, 겸면, 입면, 삼기면 등지에서는 어디에나 해발 522m의 설산의 위용을 바라볼 수 있다.

설산은 담양 무정면과 순창 풍산면의 경계를 이루는데 담양이나 풍산면에서 바라본 설산은
그저 평범하게 보일 뿐으로 옥과쪽에서 바라본 신경과 비할 바가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산은 옥과만의 산인 것 같다.

설산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의외로 금강 이북의 윗지방 쪽에서도 잘 알려진 산이었던 것 같다.
정감록 비결에 설산동십리허(雪山東十里許)에 피난지처라 전해왔다.
이러한 까닭에 예부터 국란이나 각종 사화 등으로 인한 연좌제의 화를 면하기 위해
은근히 비전되 온 피난 거쳐를 찾아 들어와 정착한 예가
옥과근교 토착 성씨인 심, 박, 허, 강, 김씨 등의 문중사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불교설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즉, 산중턱에는 신라시대에 창건 했다는 수도암이라는 암자가 자리잡고 있는데 산과 암자를 연계하여
부처님이 수도를 했다는 팔도성지중 하나인 성도를 따라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바위산의 광석질이 유리 원료인 규사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멀리서 보면 눈처럼 하얗게 보인데서 유래하고 있다고 한다.
한 때 모 사기그릇 제조회사에서 여러 차례 규석광산개발을 위해 답사해 갔다고 한다.

설산자락에는 해주오씨 세장산을 비롯한 요소요소에 형성된 수많은 묘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이는 설산과 연관된 풍수설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옛부터 구전으로 내려온 설산과 연관된 대표적인 풍수혈을 살펴보면
사자가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는 사자앙천 혈과 해가 연못으로 떨어진다는 일낙함지의 혈을 들 수 있다.
대 명당 이라는 두 혈은 아직도 그 실체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설산 정상의 분지에 자리 잡은 일명[아묏등]이 복여부로 미루어 사자앙천 혈은 아니라고 풀이한다.

옥룡자유산록에서 도전국사는 “설산의 대혈은 정상 부위가 아닌 산 아랫 부분에 있다”고 적고 있다.
즉,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와 먹이를 찾는 형국이라는 노서하전은
옛부터 이 혈을 찾고자 수 많은 풍수지사들이 설산을 찾아 연구해 왔다고 한다.
이 노서하전 혈에는 밤을 쌓아놓는 적률안의 형상이 있어야 한다는데 특히 마을 형태가 밤알맹이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밤정굴(율사리)마을이 바로 그 명당지가 아닌가 보고 있다.
특히 이 마을은 명당터라 하여 330여년전 옥과향교가 이전해 왔으나 100년 뒤 지금의 옥과리 향교터로 이전했다 한다.

옥과중학교 옆길을 따라 설산으로 가는 계곡에 형성된 전답사이로 농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오른편으로는 나무가 많은 산골마을이라 하여 목동마을이요.
왼편 길은 협소한 산골짜기 마을이라 하여 명명된 지방마을인데 현재는 두마을 합하여 설옥리라고 한다.
목동마을 윗 산이 설산이요. 지방마을 윗 산이 괘일산이다.
예로부터 대체적으로 두산을 합해 설산이라 불러왔으며,
해질녘 해가 걸려있는 모습이 일품인 봉우리라 하여 괘일봉이라 일러 왔다.
두 산은 기암 괴석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 형상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 산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을 모아 놓은 저수지가 지방마을 위에 설치되어 있다.
둑에 서서 두 산 아래 모여 쪽빛으로 가지런이 이는 물살을 바라 보노라면 어떤 태고적 신비감을 그대로 맞볼 수 있어 좋다.
또한 이 제방에서 두 산 봉우리 사이로 어깨를 매만지듯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가슴에 안다 보면
피곤한 도시인의 안식처로써 무한한 발전 잠재력을 느낄수 있다.

수년 전 뜻있는 이 지역 출신 몇 분이 설산을 전남도립공원으로 지정하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즉, 1980년대 초 5.18광주민주화운동 보상차원에서 공원개발 계획이 있었는데 부지 선정에 애로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기회에 이 공원계획을 설산지역으로 유치해 보자는 발상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중과부적으로 여론형성 과정에서 무산되기는 하였으나 아쉬운 설산개발 계획이 아니었나 싶다.
현재 광주패밀리랜드(우치공원)가 당시 광주대공원 개발계획(안)으로 된 바 있다.

수도암(절)을 끼고 왼편으로 등산로를 따라 500m쯤엔 [성금태 시암] 즉, 성금샘터가 있어 정상을 오르는 이의 목을 적셔 준다.
높이 15∼20m에 이르는 커다란 수직의 암벽 틈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는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 수가 있다.
15분쯤 가파른 암벽 통로를 따라 정상에 도달하게 되는데 아랫마을 농부들이 들녘에서 서로 주고 받는 소리들이 선명히 들린다.
상봉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멀리 무등산이 보이며, 곡성군 일대와 담양 무정면, 순창 풍산면 일대가 발아래 펼쳐진다.

정상부는 국유림으로 넓이가 약 2만여평 되는 평평한 분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엔 “아 ∼∼∼”하고 소리를 내어 묘 둘레를 도는데 숨이 차서 다돌지 못한다고 했던 묘라고 하나 조금은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이 넓직한 산정의 분지는 임진왜란시엔 군사 요충지로써 이용되기도 했다.
임란시 옥과 합강리 출신 유팽로장군이 의병들을 모아 설산 천혜의 암벽을 이용하여
둘레 1,666자의 성을 축성하고 군사를 훈련 시켰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약간의 흔적은 남아 있다.
이러한 설산고성은 지형 지물을 최대한 이용한 전략적 산성인 바 군량미의 저장과 공급을 담당한 담양의 금성산성과 연계하여
그 배후 산성으로 비밀군사 훈련기지인 것으로 보인다.

설산에는 신비스러움 만큼이나 여기 저기 전설들이 묻어 있다.
산의 모양이 말처럼 생겼다 해서 “말바위”라고도 하고 날씨가 좋은날 말바위 머리모양의 바위
(지금은 머리모양의 바위가 없음)에 신선들이 나타나 바둑을 두며 신선주를 마셨다 해서 “신선바위”라고도 한다.
자랑스런 우리 고장의 진산인 “설산” 누구나 쉽게 찾아 약 4시간정도의 즐거운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다.



설산 수도암
(매화나무-지방문화재 제84호)

설산 수도암은 신라시대 설두화상이 수도한 곳으로 전해지며 그 당시건물은 없어 졌고
1928년 임공덕보살이 창건한 건물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암자이다.

수도암 앞마당에는 지방문화재 자료 제84호로 지정된 매화나무와 잣나무가 있는데
매화나무는 수령이 약 150년이고 잣나무는 약 200년이 되었다고 한다.








3. 옥과 성황당 목조신상 (玉果 城隍堂 木造神像)
명 칭 옥과 성황당 목조신상 (玉果城隍堂木造神像)
소재지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154-4
관리자 옥과향교
문화재 종목 시도민속자료 2호

옥과 성황당 안에 보존되어 있는 남녀 한 쌍의 목상(木像)이다.
민간신앙에서 신으로 여기던 대상물로, 남자상은 서 있고, 여자상은 앉아 있는 모습인데, 높이가 각각 84㎝, 68㎝이다.

남자상은 무당들이 쓰는 모자를 쓰고 발등까지 내려오는 사제복 형태의 옷을 입고 허리끈을 매었는데,
끝이 길게 늘어져 있다. 둥근 얼굴에 크고 굵은 눈썹이 표현되었고 눈이 돌출되었다.
여자상은 머리에 고깔을 쓰고, 양 손가락 끝을 붙여 아래로 향하게 하였는데, 무언가를 들고 기원하는 모습이다.
얼굴 표현은 남자상에 비해 정교하며 자세도 다소곳하다.

남자상은 고려 명종 때의 학자였던 조통 장군으로 전한다.
여자상은 장군의 처라는 설도 있고, 장군을 사모하다 한을 품고 죽은 공주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신상은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을 신격화한 것이거나 추앙받을 만한 인물을 신격화한 것으로,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다양한 신들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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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신종(神宗)(1197∼1204, 재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벼슬을 지낸 조통(趙通) 장군이
고향(故鄕)인 옥과(玉果)로 낙향(落鄕)하자, 장군을 사모하던 공주가 옥과로 찾아왔으나
장군이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한을 안고 죽었다 한다.

후세에 이 지역 무당(巫堂)들이 죽은 뒤라도 공주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조통 장군과 공주의 상(像)을 나무로 조각(彫刻)하여 한자리에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는 애절한 사연이 전해 오고 있다.


옥과성황당목조신상









4. 곡성함허정 (谷城涵虛亭)
명 칭 곡성함허정 (谷城涵虛亭)
소재지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1016
관리자 심해섭
문화재 종목 시도유형문화재 160호


조선 중종 38년(1543) 심광형이 이 지역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로 일명 호연정이라고도 한다.
증손자 심민각이 오래된 정자를 옛 터 아래쪽으로 옮겨 다시 지었으며 5대손 심세익이 고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80년에 수리를 한 것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성은 마루 1칸을 3면을 터 만들었고 2칸 반은 방으로 꾸몄다.
나머지 오른쪽 반 칸은 바닥을 한 단 높여 쪽마루를 두었다.

정자 아래로 흐르는 섬진강, 울창한 숲, 멀리 무등산이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약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심광정이 세운 군지촌정사(중요민속자료 제155호)가 있다.

당대 학문을 익히던 선비들의 수양지와 휴식처를 빼어난 경치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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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조선(朝鮮) 중기(中期)에 광양(光陽), 곡성(谷城) 등 여러 고을의 훈도(訓導)를 지낸 바 있는
당대의 문사(文士) 심광형(沈光亨)이 만년(晩年)에 이 지역 유림(儒林)들과 풍류(風流)를 즐기기 위하여
중종(中宗) 38년(1543)에 건립한 정자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민도리 소로수장(小累修粧)의 간결한 구조로,
삼면이 트인 마루 1칸, 방 2칸반, 그리고 바닥을 한단 높인 쪽마루 반칸의 평면구성이다.

건물 아래로 섬진강(蟾津江)이 흐르고 있으며 주위에 수목(樹木)이 울창하고
멀리 무등산(無等山)이 백리광야에 우뚝 솟은 명승지로 자리잡고 있어
과거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부임하면서 반드시 봄철에 향음례(鄕飮禮)를 베풀었다고 한다.

가까이에 심광형이 후학(後學)을 위하여 건립한 군지촌정사(군池村精舍)가 있어
당대 무사들의 수양하던 곳과 휴식처를 함께 음미할 수 있다.


곡성함허정









5. 월파 유팽로장군 정열각
명 칭 월파 유팽로장군 정열각
소재지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48
관리자 옥과면
문화재 종목 문화재자료 25호


유월파 정열각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우다 죽은 유팽로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인조 3년(1625)에 세운 건물이다.

'월파'라는 이름은 유팽로 장군의 호인 월파에서 비롯되었다.

유팽로 장군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과거에 급제하고도 부모 봉양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부모에게 효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호남지역으로 침입하고자 금산에 집결한 왜적을 공격하다가 고경명·안영 장군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유월파 정열각이 있는 옥과면 북쪽 끝에는 장군의 말 무덤이 있다.
유팽로 장군이 금산 싸움에서 전사했을 때
그의 말이 장군의 머리를 물고 먼 길을 달려 그의 생가까지 갔고 부인이 장군의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말은 마구간에 들어가 9일이나 여물을 먹지 않은 채로 계속 울다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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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각(旌閣)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유팽로(柳彭老)(1554∼1592)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렬각이다.

장군의 자(字)는 군수(君壽), 호(號)는 월파(月坡)로서 어려서부터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선조(宣祖) 8년(1571)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 선조 21년(1588)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10여년간 고향에 은거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월파 장군은 호남지역(湖南地域)으로 침입하고자 금산(錦山)에 집결한 왜적을 공격하다가
고경명, 안영(安瑛) 장군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死後)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추증(追贈)되었고 이어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가증(加贈)되었다.

유월파정열각








6. 영귀 서원
명 칭 영귀서원
소재지 전남 곡성군 겸면 현정리
관리자  
문화재 종목 비지정 문화재



1564년(명종 19) 옥과유림들이 옥과현감으로 재임했던
하서(河西) 김인후의 학문과 절의를 추모코자 건립한 사우로
처음 옥과면 죽림리에 영귀정사(詠歸亭祠)로 세워진 뒤,
그로부터 130년 후인 1694년(숙종20)에 들어와 영귀서원(詠歸書院)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자료에 따라 배향인(配享人)이 다르게 나오는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주향(主享) 김인후 외에
유팽로, 이흥발, 신이강을 제향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와달리 『영귀서원지』에는 이흥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대신,
유팽로, 신이강 외에 허계(1797년 추형)와 허소, 허계, 위백규 등
모두 6위의 위패를 봉안(奉安), 제향(祭享)하고 있다.

영귀서원








7. 성륜사
명 칭 성륜사
소재지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650번지
참조 - 성륜사 홈페이지 http://www.goldenwheel.org/






8. 옥과미술관
명 칭 옥과미술관
소재지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관리자 전라남도
연락처 061) 360-8224
참조 - 옥과미술관 홈페이지 http://www.okart.org/



아산 조방원 화백(1922년 전남 무안출생)이
자신의 노후 작품 활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육성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키 위해
평생 모아온 미술품 6천 7백여점과 부지 4천 2백여평을 전라남도에 기증함으로써
지난 88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96년 완공된 전라남도 옥과 미술관은 옥과면 옥과리에 소재하여
4천 2백여평의 부지에 2층으로 3백여평 규모의 전시관을 구비한 현대식 미술관이다.

옥과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찾아 가려면 옥과면 소재지에서 죽림천을 따라
포장도로 10여분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지동마을이 나오고
다시 왼편으로 조금 더 가다 보면 검정 기와 지붕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옥과미술관과 숲속에 은근히 성륜사가 나타난다.

옥과미술관 1층 전시실에는 남도 중진 및 중견작가 작품 등, 동·서양화 40여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에는 아산 조방원 선생이 기증한 소치 허련 선생의 사군자 , 모란 ,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서간문 , 퇴계 이황 선생의 詩
그리고 아산 조방원 선생의 작품 歸路 , 田家 등이 전시되어 가족 방문객과 미술 관람객들의 발길이 계속되고 있으며
전남 미술의 진수를 한눈에 느낄 수 있고 전남 예술인들의 창작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전당이 되고 있다.


옥과미술관








9. 광주 컨트리클럽
명 칭 광주 컨트리클럽
소재지 전남 곡성군 옥과면 수리, 합강리, 송전리 일대
위치 옥과 소재지에서 무창삼거리 그리고 입면방면으로 가다 10번국도 좌측편 위치
연락처 061) 362-5533



· 광주 관광 개발주식회사가 1983년 10월 전남 최초 개장한 골프장
· 가족단위 골퍼등 전국체육대회 및 각종대회 개최
· 가입회원 1360명, 종업원 250명